오래간만에 찬양 콘티 공유로 돌아 왔습니다. 사실 그 동안 수 번의 찬양 인도가 있었으나, 개인적인 삶이 바빠 콘티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었네요. 그간 밀린 콘티들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이곳에 하나씩 다시 업로드하려 합니다.
저는 찬양 인도를 준비하면서, 실제 설교를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설교를 준비하듯이 합니다. 혹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한 번의 찬양 인도 콘티에 대해서 못 해도 두 시간 이상은 풀어서 설명할 자신이 있습니다. 단 20분의 찬양 인도 콘티를 가지고 말이지요. 그만큼 저는 방대한 생각을 가지고 한 번의 찬양 인도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찬양 인도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 내용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고, 다시 한 번 압축합니다. 종래에는 한 문장 또는 두 문장 정도로 줄어들 때까지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찬양 인도자의 자리는 설교를 하라고 있는 곳이 아니기에, 저는 찬양을 인도하는 그 본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할 시간에 찬양 후렴구를 한 번 더 반복하는 게 낫다는 입장입니다.
영감을 발산하고 은혜를 끼치는 데에는 찬양 앞과 뒤의 기도, 그리고 찬양 가사로 거의 충분합니다. 아주 약간의 삐걱임이 있는 부분에 윤활유 같은 느낌으로 멘트를 하게 되는 것이고요. (당연하게도 공식적이고 정기적인 예배가 아닌, 찬양 집회 등의 특수한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차라리 저는 찬양 가사를 어떻게 하면 더 영감 있게 부를까, 찬양 전의 기도 그리고 찬양 후의 기도를 어떻게 하면 더 은혜롭게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고민하게 됩니다.
선곡 배경
제가 가지고 있던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회개하면, 겸손해진다.'는 게 그것입니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잘못됐습니다. 사실은 '겸손한 자가, 회개한다.'가 옳은 설명인 듯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하고 자복하는 심령은 겸손한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애초에 겸손이라는 게 없으면, 회개에 이르는 길을 시작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믿지 않아도 삶이 너무 행복합니다. 그러면 깊은 회개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는 데 하나님이 필수불가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합니다. 그리고 늘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더 의롭다 하실까요.
하나님 앞에, 그리고 회개로 나아갈 때에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회개’에 대한 오해를 한 가지 풀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예수 보혈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할 권리’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이 권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 직접 아뢸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옛적에는 오직 레위 지파의 제사장을 통해서만 그리고 제사를 통해서만 죄를 멀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각각 예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권리는 여기까지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월권입니다.
그렇기에 빌립보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쭉 설명하다가, 갑자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에서 떠나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죄를 멀리 하는 것은, 우리의 결심이 필요하겠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죄를 도말하도록 명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기도만 하면 즉시 나의 죄를 스스로 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명백한 교만입니다. 그 생각이 자라고 자라면 교만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는,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즉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의 찬양은 이러한 마음을 갖길 바라며 선곡했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F
참 부를 때마다 눈물 나는 가사입니다. 예로부터 두 손을 든다는 건 항복 내지는 겸손의 표시였지요.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사실 이 찬양 가사에 전부 다 들어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찬양들은 이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심화 시키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회개에는 우리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딱 거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박대하시면 더 갈 곳 없어서 간절히, 더 간절히, 더 겸손히 나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잔잔히 시작하여 점점 고조하여 진행했습니다. 마지막 후렴은 충분히 반복하였고, 찬양이 끝나며 기도로 넘어갔습니다.
송폼
11B 2B 3BBBB
-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영혼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 없네 -
나 예수 의지하므로 큰 권능 받아서
주 앞에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후렴)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두 손 들고 F
앞 찬양에 이어 한 번 더 두 손을 든다는 가사가 들어 있네요. 이 찬양의 다른 가사도 마음에 들지만, 오늘의 주제에 비추어 보자면 특히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라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 헛된 마음이 무엇일까요. 교만과 욕심, 죄악된 마음이지 않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하등의 쓸모 없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걸 모두 내려 놓고 오직 성령으로, 참 겸손함으로 충만하게 되길 원한다는 그런 고백이 이어집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부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이 반복했습니다.
송폼
BBBC AABC AABBBBC
두 손 들고 찬양 합니다
다시 오실 왕 주 예수께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십자가를 질 수 있나 G
설교의 마무리는 우리가 받은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이르면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내가 기도할 제목, 결단할 내용들을 나눌 수 있는 가사가 마지막에 오면 좋은 듯 합니다. 마지막 찬양은 바로 그런 의미로 선곡하게 됐습니다. 회개하는 자,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죄를 사해 주시고 자신의 일을 맡기실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멍에를 멘 자들에게 하나님은 물어 보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라고 여전히 겸손히 담대히 선포했으면 합니다. 바로 우리가 죄로부터 떠나게 된 그 때의 마음처럼 말이죠.
송폼
1B 234B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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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
너는 기억하고 있나 구원 받은 강도를
저가 회개하였을 때 낙원 허락 받았다 -
주께 네 혼 맡기겠나 최후 승리 믿으며
걱정 근심 어둔 그늘 너를 둘러 덮을 때 -
이런 일 다 할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용감한 자 옛날처럼 선뜻 대답하리라
후렴)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