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속 나

신성에서 인간성으로, 교회가 바뀐다

야너도행복할수있어 2022. 12. 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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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교회에서 찾길 원하는 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기독 인구가 가파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절대적인 개신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건 둘째 문제다. 진정한 위기는 다름 아닌 교회 내 연령대에 따른 인구 구조의 붕괴다. 한국 교회에 청년들이 사라지는 중이다.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사람,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잘 살펴 보면 대부분이 장년이다. 젊은 사람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한 명씩 보인다.

 

그간 교회들이 노력하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저런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거스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인지 아직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만, 어찌 되었든 기독 청년 인구가 가시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가슴이 아파 오는 건 사실이다.

 

해도 해도 안 되면 이 쯤 되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생각해 보는 게 사람 심리다. 문제를 찾아야 해결을 할 것 아닌가. 누군가를 탓해서만은 이 현실을 이겨낼 수 없다. 나 역시 이같은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 명의 기독 청년으로써, 어느새인가 오랜 시간 동역해 왔던 친구들이 한 명 두 명씩 없어지고 이제는 한 손에 꼽을 만큼만 남아 있는 현실 앞에서, 이 시대의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90년대생 모태신앙에게 있어 '교회의 회복'이란 어릴 적 수련회에서 맛 본 '앗 뜨거운 성령의 임재'일런지 모른다. 곳곳에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몇 시간씩 통성 기도를 하고, 오로지 복음과 성경 외에는 관심 없었던 그 시절이 다시 도래해야만 교회가 회복된 거라고 여길런지 모른다. 가요는 사탄의 음악이라 안 되고, CCM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오직 찬송가만 부르고 들어야 한다는, 그런 가치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어렴풋이 생각할런지 모른다.

 

그 때는 그랬다. 사람들은 '신성'에 목말라 있었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열광했고,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공산주의의 붕괴, 자유주의의 승리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사람들의 인식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이와 다소 맞닿아 있는 '하나님 나라', 즉 '신성'이라는 게 그리 생소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운동권에 투신하던 열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뒤바뀌고, 자유주의를 수호하던 사람이 진리를 지키게 된 간증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이 시대적 열풍은 꽤 오래 가서, 주역은 60년대생이었지만 그들의 자녀인 90년대생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됐다. 한 세대 동안 한국 교회에 자리잡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게 '정석'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등 형이상학적 가치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 나라', '신성' 등 지금 당장 눈으로 볼 수 없고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90년대생이 과거 경험했던 수련회에의 뜨거운 성령 충만은 내부 결속과 내부 부흥에는 아주 효과적일지 몰라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좋은 유인책이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나는 '인간성'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고도의 성장기에는 하루가 다르게 시대가 바뀌므로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오늘 열심히 살아도 내일 별로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불안감이 사회에 엄습해 있다. 사람들은 미래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맞춘다. 미래에 대해 고민할 여력이 없다 보니, 다가오는 인생의 사건들을 쳐내기 바쁘다. 그러다보면 문득, 스스로가 인간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거대한 사회의 기계 부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교회는 그런 그들에게 그나마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숨통을 트여 준다. 사람들은 따뜻하게 환영해 준다. 그간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다시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든다. 교회의 이런 부분은 차가운 이 시대 속에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의 따스함은 가장 신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터인데,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그 사랑에서 지극한 인간성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의 목적은 사람을 위로하고, 따스함을 안겨 주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목적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뜨겁게 기도하도록 만드는 데 있지도 않다. 교회는 인간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발전해 나가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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